노동을 중심으로 한 세대 권력의 변화

노동 세대 = 은퇴 세대

노동 세대 = 부양 세대

노동 세대 = 배움 세대


중에서 누가 세대 권력을 행사하고 있을까?

농경사회에서는 은퇴 세대에 막강한 권력이 있었다. 농사에 있어서 만큼은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어 그들이기에 노동 중인 부양 세대에게 가르칠 것이 많았고, 은퇴 세대에 대한 노동 세대의 부양은 가르침의 댓가였을 것이다. 삶의 끄트머리를 살고 있는 은퇴 세대는 권력을 사후 세계까지 이어가고 싶었을 것이고, 농경 사회에 정착된 제사 문화는 그렇게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산업사회에 진입하면서 권력 구조의 개편이 일어났다. 공장에서 노동을 해야 하는 부양 세대는 이상 은퇴 세대에게 받을 가르침이 없었다. 생산력의 확대를 위해 날로 발전하는 기계는 은퇴 세대가 사용했던 낡은 것이 아니었고, 이제 은퇴 세대가 왔던 가르침의 역할은 근대화된교육 담당하게 되었다. 역할의 축소가 권력의 축소로 이어지자 은퇴 세대는 심각한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권력은 자식과도 나누지 않는 법이다. 은퇴 세대의 입장에서 장장 1 동안 누려왔던 권력 유전자를 포기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은퇴 세대는 권력을 주장할 있는 자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어린 세대에게 일방적인 가르침을 행사하는 강력한 꼰대가 되어 갔다. 

동시에 부양의 책임은 가족에서 국가로 전가되었다. 은퇴 세대와 노동 세대의 가족 갈등은 산업사회를 유지해야 하는 자본이나, 자본 확장의 토대 위에 형성된 근대 국가의 입장에서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였기 때문이다. 노동 세대는 산업 역군으로 영웅화되었고, 노동 세대를 위한 복지국가 모델이 제시되었다. 산업 사회를 유지, 확장하기 위한 자본과 국가의 카르텔이 시작된 것이다. 이렇듯 복지국가 모델은 우리가 생각하듯 나이브하게 인권이나 국가의 시혜(?) 차원이 아니라 자본의 요구와 국가의 필요성에 의해 형성된 모종의 카르텔이 부양 세대에게 보다 효율적으로 노동을 요구하기 위해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탈근대의 세대 권력

탈근대를 향하고 있는 지금, 세대 권력은 누가 소유하고 있을까? 은퇴 세대와 노동 세대 그리고 배움 세대는 현재 치열하게 세대 권력을 중심으로 투쟁하고 있는 중이다. 은퇴 세대를 향한 부양의 의무는 국가화 되었고, 배움 세대에 대한 교육의 책임 또한 가족에게만 전가할 수는 없는 문제가 되었다. 대한민국의 교육, 아니 사회 문제의 중심에는 여전히 권력 프레임 안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는 세대 문제가 심각하게 또아리를 틀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대한민국은 빠른 경제 성장이 필요했던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이러한 중요한 문제가 매번 후순위로 밀려 왔다는 것이다. 태극기를 들고 광장에 모이는 어르신들은 가족도 국가도 부양의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서 산업 역군이라는 영웅으로 존재했던 개발 독재 시대의 영광을 현재로 소환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가족 권력 안에서 죽이며 살고 있는 배움 세대는 기성세대가 일방적으로 만들어 놓은 참혹한 제도 안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외에는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체념 속에 빠져 있다.[각주:1] 아이들은 누구보다 알고 있다. 불확실한 미래, 흙수저로 태어난 대부분의 아이들은 SKY 나와도 인생의 종착역은 치킨집 사장이며, SKY 나오지 않아도 치킨집 종업원 정도는 있다는 사실을... 


세대가 가지고 있는 시대적 속성

노동 세대는 탈근대화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전근대인 중세를 살고 있다. 그들은 현실 속에서 사장되어 버린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무작정 신봉한다. 마치 중세시대 인류가 모든 것을 신의 뜻이라고 여기고 의존했던 것처럼...

노동 세대는 인간이 절대이성이라는 오만에 빠졌던 근대에 철저하게 머물러 있다. 자본이, 그리고 그에 대항해온 좌파 철학이 노동에 대한 과도한 가치매김으로 인해 노동하는 자는 인간사회에서 무소불위의 세대 권력을 가진 신으로 존재한다. 

그저 불확실한 우연에 자신의 미래를 맡길 수밖에 없는 배움 세대는 은퇴 세대와 부양 세대로 인해 오염된 탈근대 속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부정한다. 배움 세대는 자신을 옥죄고 있는 제도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미 충분한 삶을 살아온 은퇴 세대와 부양 세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된 강한 확신, 확신의 결과적 필연인 제도가 우연에 기댄 불확실한 미래를 살아갈 배움 세대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세대와 세대, 권력 관계를 넘어 역할 관계로

명품 배우로버트 니로 뮤지컬레미제라블 헤로인 헤서웨이 주연한인턴이라는 영화가 있다. 개인적으로 세대와 세대가 서로에게 어떠한 역할로 다가가야 하는지 가능성을 보여준 영화라고 생각한다. ‘로버트 니로 분한 벤은 은퇴한 줄스( 헤서웨이) 운영하는 전도 유망한 벤처 기업에 국가 지원을 받는 인턴으로 취업한다. 처음에는 마치 , 쳐다보듯이 벤을 대하는 줄스하지만 벤의 노련함은 패기의 벤처 기업 사장인 줄스가 공적, 사적으로 놓치고 있는 많은 일들은 멋지게 보완한다. 있는 없는 줄스의 표정에서 숨겨져 있는 의도를 직원들에게 기분 나쁘지 않게 전달하며 사장과 직원 사이에 윤활류가 되는가 하면, 바람을 피우는 남편에게는 적절한 충고를 통해 가정의 평화를 지켜 준다. 


만약 세대와 세대가 권력이 아니라 역할 중심으로 관계를 맺는다면 영화인턴에서 처럼 세대와 세대가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이상적인 관계로 나아날 있지 않을까? 하여 권력 관계에 머물러 있는 대한민국의 세대 정책을 비판적인 관점으로 보고 있다. 노인과 여성, 최근엔 청년을 사회적 약자로 규정해 놓고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서로가 서로를 정책 경쟁의 장으로 내몰고 있다. 은퇴한 노인들에게 일자리를 두고 경쟁하게 만드는 노인 일자리 정책은 문제를 넘어 폐륜에 가깝다. 노인 정책은 노인이 다음 세대에게 있는 적절한 역할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여성정책은 가부장제 속에서 성적 대상으로, 출산과 육아의 책임, 그리고 댓가 없는 가사노동으로 몰았던 여성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책임을 국가와 사회가 함께 있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청년 정책은 혈기 넘치는 청년들이 다른 세대를 위해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겸손한 마음으로 지지하는 것이어야 한다. 

신이 지배했던 중세를 벗어난 인간은 절대이성을 추구하며 신에 다가가고자 했다. 그것이 근대다. 차례의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를 겪으며 인간은 스스로 인간이 인간에게 신보다 위험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근대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인간은 부족하다. 그래서 인간은 역설적으로 완벽하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탈근대를 향하고 있는 인류, “post-modernicus” 철학이다.

@back2analog

  1. 청소년들 사이에 자해가 신드롬처럼 확산되고 있다. (김은향. "피 예쁘다” 청소년 ‘자해 동영상’ 유행 어쩌나…전문의 “전염병처럼 번져”. 동아일보. 2018/10/2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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