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과 혁신의 배신

한때 지인들의 PC를 조립해 주기 위해 용산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적이 있었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언젠가 인텔에서 CPU 소켓을 두 종류로 생산하면서 메인보드와 CPU 궁합 맞추는 게 어려워졌고, 램도 30핀, 72핀을 넘어 DDR2, 3, 4로 진화하면서 램 소켓이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뿐만아니라 조립 PC 시장이 급속히 팽창하는 과정에서 안정적인 파워, 열을 효율적으로 배출할 수 있는 케이스 등 PC 하나를 조립하기 위해 선택해야 하는 옵션이 감당하기 싫을 정도가 되자... 조립된 PC를 주문하는 게 더 경제적이라고 판단, 난 더이상 PC 조립을 안하게 되었다.

난 혁신을 수면 아래 잠자고 있는 인간의 욕망을 건드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예수, 맑수에 이어 잡수까지... (모두 ‘수’자 돌림이네... ㅋㅋ) 그들이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인류에게 회자되는 이유는 인류의 욕망을 유도하거나 강제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잠재되어 있던 인류의 욕망을 통찰했고, 적절하게 그 욕망을 해소해주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예수는 자신이 곧 신과 동격이라고 뻥을 쳐왔던 지배계급에 대한 피지배계급의 의혹이 수면 아래 잠자고 있다는 것을 통찰해 죽음으로써 제대로 된 신의 전형을 명쾌하게 제시했다.
맑스는 소수의 자본가가 다수의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주의의 몰인간성을 통찰해 인류 역사의 본질은 계급 투쟁이라고 꼬드겨 인류를 계급 투쟁이라는 외길로 인도하였다.
잡스는 전기를 공급하고 네트웍에 접속할 수 있게 해 주었던 모든 선을 끊어버리고 장소에 억압되어 있던 PC를 해방시켰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혁신을 가로막는 가장 거대한 걸림돌은 과거의 통찰과 혁신인 것 같다.
인류를 지배계급이 투영된 찌질한 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던 예수의 혁신은 절대적 신이 지배하는 암흑의 터널인 중세로 이어졌고, 맑스의 혁신은 조너선 하이트가 ‘민주주의 정원’ 추천사에서 밝혔듯, 유기적 시스템이 가지는 상호 연관성을 이해하지 못해 근대를 절대 이성이 지배하는 신념의 폐허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잡스가 시작했던 모바일 혁신은 이제 인류가 아닌 자본의 이익을 위한 혁신의 길로 접어든 것 같다.
우리가 철지난 과거의 통찰과 혁신에 대한 교조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의 통찰을 무시해서도 안되겠지만, 교조적 관점으로 현실 문제를 바라본다면 그 답을 찾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예수, 맑스, 잡스의 공통점은 현실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류가 축적한 모든 지식을 편견없이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예수는 유대교의 신에서 출발했지만, 이교도를 배척하지 않았다. 맑스는 관념론의 범주에 있던 해겔의 변증법을 품었다. 하버드의 철학도였던 잡스가 문과적 상상력 안에만 갇혀 있었다면 과연 아이폰을 만들 수 있었을까?

우리는 모두 자신이 살아왔던 현재완료적 관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현재완료적 관성 안에 존재하고 있는 과거는 권력이 되어 우리의 미래를 억압한다. 강산이 십 년 쯤 되어야 변하던 시절에는 권력화된 과거의 경험이 미래에도 유효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도 그러한가? 분단과 전쟁과 경제 성장과 민주화의 경험이 불확실성에 기인한 내일의 불안감을 제거해 줄 수 있는가? 관성이 그러할진데... 과거에 대한 교조는 말해 무엇하랴!

예수의 부활에 합리적인 의심을 던졌던 도마의 후예들이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의심의 유전자는 죄가 아닌 축복이니, 이제 과거의 통찰과 혁신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발목을 어떻게 붙잡고 있는지... 확신에 찬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함께 의심해보지 않겠는가?

@back2analog



Comments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