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인정하고, 합의하는 협치!!!

한낱 ‘인간의 입장’에 ‘신적 가치’를 덧씌워 ‘인정’과 ‘합의’의 과정 없이 일방향으로 ‘주장’하거나 그 주장을 ‘관철’시키는 협치는 ‘협치’가 아닐뿐만 아니라, 그 상황을 납득하지 못한 다른 ‘입장’의 불만을 축적하여 장차 의도치 않은, 나아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역설적 결과’로 이어진다. 우리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모든 현상은 그러한 역설의 결과일지 모른다. 


1. 협치는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입장과 일단, 무작정, 그리고 무조건 만나는 것이다.
만나기 싫다고? 그럼 나만 손해다. 그렇다고 나와 다른 그 입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므로... 협치는 입장의 차이를 인정하기 보다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분리, 배척하는 것에 더 익숙한, 소위 진보들이 활동하기에 애초부터 불리한 운동장이었는지 모른다. “협치는 개뿔, 무조건 투쟁!!!”
반면, 현재의 제도적 상황이 만들어 준 기득권에 만족해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보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절차적 자격을 내세운다. “자격 없는 사람은 모두 열중 쉬어!”
협치가 어색한 진보나, 협치의 원리를 의도적으로, 또는 의도와 무관하게 악용해 온 보수나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적어도 협치에서는 모두 쓸모가 있다. 입장과 입장이 만나야 하는 협치에서의 쓸모는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2. 협치는 아직 합의되지 않은 나의 가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다.
입장이 다른데 어떻게 인정을 하냐고? 그러니까... 그럼 협치하지 말고 투쟁 하시라니까? 다른 입장을 인정도 하지도 않을 거면서 왜 협치판에 들어왔냐고오오~
자격이 없는 사람을 인정하라고? 그래, 당신이 무시하는 그 사람이 바로 당신에게 그 잘난 자격을 준 사람이라고오오~
협치에서 서로 다른 입장에 대한 인정이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는, 협치는 자격만 가지고는, 또는 내용만 주장해서는 풀지 못했던 사회적 과제들을 자격과 내용이 만나 함께 풀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러므로 협치는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주체들이 합의한 방향과 거리만큼 이동하는 것이다.
적어도 협치에 있어서는 신념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합의이다. 합의한 길이라면 설령 그 길이 잘못된 길이라고 하더라도 되돌릴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협치의 길에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불만을 내재하고, 결과의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한다. “거 봐~ 내가 뭐라 그랬어.” 우리는 합의란 걸 모르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사회구조화된 문제의 책임으로부터 나를 분리해 상대방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키고 있는 걸까?

협치는... 내가 논문에서 주장한 바에 따르면, 정치적인 작동원리가 아니라 경제적인 작동원리에서 비롯되었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 바로 협치이다. 넓게 보면 서구의 시민사회도 국가와 시장 사이에서 경제적인 문제를 합리적으로 조율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오죽하면 그람시는 시민사회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완화시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방해하고 있다고 비판했을까! (그람시 맞나? 암튼 유명한 맑시스트가 한 말이다.)
반면, 대한민국의 협치, 그 협치에 가장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시민사회는 대부분 정치적인 작동방식에 매우 익숙하다.

얼마전 있었던 어떤 회의의 모습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고 있어서일까? 며칠째 계속된 잡념이 나의 새벽잠을 깨우고 이 따위 자조적이고 조잡한 글질로 이끌었다. 

@back2ana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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