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단어로 포장된 악한 의도, “돌봄”


언젠가부터 돌봄이라는 단어가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단어 자체는 따뜻하고 선한 의도가 담겨 있는 같은데... 돌봄이 문제일까, 아니면 내가 문제일까?

이러한 인지부조화를 극복하기 위해 흔히 다음과 같은 태도를 취한다. 

먼저 최대한 객관적으로 불편한 대상을 살핀다. 그러고 불편하게 생각하는 나를 의심한다. 


먼저, 내가 돌봄이라는 단어를 불편하게 생각하는지 살펴 보았다. 

번째, 교육(敎育) 관점에서...

교육이 포괄하는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교육을 단어 그대로 설명하면 가르치고(), 기르는() 것이다. ! 벌써 답을 찾은 같다. 교육의 개념 안에는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이미 기르는 행위 , 돌봄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돌봄 강조하는 행위에서 돌봄을 교육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의도가 느껴졌기 때문에 돌봄이라는 단어를 불편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만약 돌봄을 교육에서 기어이 분리시켜야 한다면, 교와 육도 나누어야 한다. 교육부는 교부로, 교육청은 교청으로... 

그럼 교사는? 교사를 교육사라고 하지 않으니 가르치는 사람일 게다. 그러면 육사를 따로 두어야 하나? 답을 찾았다 싶었는데 다시 미궁으로 빠지고 말았다. ㅠㅠ


미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번째로 권력의 관점에서 돌봄을 살펴보자. 

근대로 들어서며 교육은 전통적인 기능인 성장(사회화) 선발이 더해졌다. 단순히 더해진 것이 아니라 근대교육에서 선발은 성장을 압도한다. , 근대교육에서는 성장이라는 내적 동기보다 선발이라는 외적 필요성이 강하게 작동한다. 이미 기득권을 가진 세력은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해 교육을 활용한다. 제도를 가르치고, 제도에 순응하는 인재를 양성하고... 그렇기 때문에 근대교육을 이해하기 위해선 본질 속에 꼭꼭 숨겨져 있는 권력 관계를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돌봄이라는 좋은 단어를 권력과 결합하여 이해하면 강제적 관리의 측면이 부각된다. 바쁜 산업사회 속에서 부모는 노동을 해야 한다. 주거비와 교육비가 가계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부모들은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기르는 행위를 포기한다. 그래야 교육의 선발기능이 성장기능을 압도할 있으므로... 그러면 누군가는 부모 대신 아이들을 돌봐야 한다. 그러기에는 학교가 너무 힘들다. 마을은 힘들다. 나는 그래서 등장하게 개념이 바로돌봄 아닐까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본다. 


돌봄이라는 단어는 교육과 관련한 많은 이해관계자들을 만족시킨다. 이해관계자들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있을까? 친절하게 열거해 주겠다. 

돌봄을 교육과 분리함으로써 교육 전문가를 자임하는 교사는 가르치는 행위에 집중하고 싶어한다(교육이 아니라전문가?). 부모는 가정교육의 책임을 국가에 전가할 있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나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국가는 부모들이 전가한 가정교육을 관리(돌봄?) 치환하여 오매불망 국민들이 요구하는 일자리를 양산한다. 그리고 자본은 안에서 교육을 중심으로 얼마든지 선순환할 있는 생태계를 파괴한다. 생태계 파괴는 소비자들에게 중복, 과소비를 부추겨 자본주의가 과잉생산의 모순으로부터 탈출할 있는 발판을 제공한다. 그러면 독립된 자아를 가지고 태어났으되 아무런 선택권도, 힘도 부여받지 못한 아이들은? 

교육과 분리시켜 돌봄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 더이상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마을이 필요하다고 나불대지 마라! 나온다. 대신 아이를 키우기 위해선 오직 자본의 논리에 따라야 한다고 솔직하게 고백하기 바란다!


번째, 지방분권의 관점에서...

우리에게 절박하게 필요한 것이 기아로부터 탈출할 생산력의 확대라면 모를까, 과잉 생산된 결과를 분배하는 것이 중요한 시대라면 권한은 나눌수록 좋다. 지방분권이 제기된 배경은 가지다. 하나는 경제 성장의 결과가 공정하게 분배되지 못하면서 발생하게된 양극화의 문제가 오히려 경제 성장의 발목을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중앙정부가 자신의 역할을 과대포장하고 있는 사이, 지방정부는 주민의 참여를 확대하며 꾸준히 성장해 왔기 때문이다. 중앙정부로부터 권한을 이양받아도 충분할 정도로...

중앙정부가 자신의 기준을 잣대로 우수한 자치구를 선정하여 지원하고, 자치구의 모범 사례를 확산시키겠다고 하는 전략은 마치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경제 성장 방식인 낙수효과와 다르지 않. 낙수효과는 심지어 신자유주의를 대변하는 IMF에서도 오류을 인정하고 폐기한 경제 성장 전략이다(이영창 기자. 2015/6/16. “부의 낙수효과 없다... 저소득층 소득 늘어야 성장”. IMF 159개국 연구보고서. 한국일보.). 경제나 돌봄이나 중요한 양극화의 해소다. 정부가 재벌을 지원하면 일자리가 아니라, 사내 유보금만 늘어나듯,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은 자치구의 모범 사례는 절대 다른 자치구로 전파되지 않는다. 중앙정부는 자신의 지원한 예산이 실패한 정책으로 귀결되어 예산 낭비라고 비난 받는 것이 두려운 모양이다. 정도 비난도 감수할 생각이 없다면 차라리 중앙에서 내려오는 것이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다. 중앙정부의 이러한 관성은 이미 나가고 있는 자치구에 예산을 지원해 기존의 생태계를 왜곡시킬뿐만 아니라, 정작 지원이 필요한 자치구로 하여금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도록 조장한다. 일례로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는 자치구의 다양한 센터들의 시선은 절대 지역을 향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돈줄이 중앙정부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평가에 몸을 움츠린다. 이쯤되면 지방분권을 주장하는 자치단체장들은 서로 어깨를 걸고 중앙정부가 제안하는 모든 공모에 보이콧을 선언할 만도 하. 바야흐로 지방분권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지 않은가!


결론이다. 

첫째, 돌봄을 교육으로부터 분리하려는 시도를 중단해야 한다. 누가 가르치고, 누가 돌볼지 고민할 시간에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지방정부 단위의 마을교육생태계를 조성할 것인지 고민하기 바란다. 

둘째, 중앙정부는 자신의 기준과 잣대로 지방정부를 세우면 국가가 성장한다는 확신을 거두기 바란다. 이미 벌어질 대 벌어진 지역간의 간극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만족하지 못하는 평균적인 기준을 들이대기 보다, 간극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 그러므로 자치단체를 경쟁으로 내모는 공모를 중단하고, 정말 필요한 예산과 정책을 지방자치단체에 지원하기 바란다.

셋째, 중앙정부는 지방분권 시대에 대비한 중앙정부의 역할에 대해 고민해 주기 바란다. 지금은 중앙정부가 나를 따르라 하면 지방정부가 경쟁적으로 따라가는 시대가 아니다. 새로운 것을 제안해 쌩색을 내기보다 지방정부에서 이미 추진하고 있는 다양한 돌봄 관련 정책들에 대해 학습한 중앙정부 차원에서 지원해야 것은 무엇인지 살펴주기 바란다


내가 불편한 대상 , ‘돌봄 대해 살펴본 결과 문제는 나에게 있지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불편함에 대해서도 의심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back2ana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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