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소대표와 과대대표...

마치 복음을 전하는 전도사처럼... 협동조합을 빡씨게 전파하고 계시는 주수원 선생님이 내 페북에 ‘과소대표’와 ‘과대대표’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물어오셨다. 내가 가진 유일한 전문성은 바로 비전문성이다. 그 진지한 물음에 나는 비전문성을 발휘해 어설프게 답하고자 한다. 한마디로 현문에 우답이다... 



현문 : 과소대표와 과대대표...

협동조합, 사회적경제, 마을(교육)공동체, 도시재생 등 여러 곳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인 것 같다. 시간, 공간의 한계로 의견수렴은 대의제로 구현된다. 그 가운데 항시 나타나는 문제가 과소(내지 과대) 대표성인 듯.

특히나 새정부 들어서 정부, 지자체, 교육청이 함께 정책을 논의하면서 이러한 문제가 더 커진다. “왜 매번 똑같은 사람이 대표를 하느냐”부터 “숫적으로 많지 않은 그룹의 의제가 왜 올라오느냐”, “왜 우리의 이슈는 의제에도 올라가지 못하느냐”까지... 그동안 여러 경험이 쌓여왔다고는 하지만, 정책이 더 커지고 관계자가 많아지다보니 의견을 수렴하는 방법의 한계도 드러나고 때로는 갈등도 생긴다. 어떤 이슈를 숫적으로 파악하기도 어렵지만, 또 수에 맞춰서 기계적으로 대표를 하는게 맞는지도 문제다.

더 어려운건 정책적인 언어화가 어렵거나, 언어화를 해도 현재의 흐름과 달라 힘을 얻지 못하는 경우들이다. 현재의 지역기반 혁신에 있어 정부, 지자체, 교육청의 자원이 크고 이를 주도하다보니 정책과의 결합성이 각 사업들의 성패로도 연결된다. 민간의 자원이 축적되고 성장하는데는 시간이 걸리니 당분간 이 흐름은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양한 주체들의 의견을 수렴하며 민관협의체를 구성할 것인가인데 이 부분이 쉽지가 않다. 그래서 결국엔 거버넌스가 화두인가 싶기도 하다.


우답 : 문제의 해결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문제는 답이 있지만 동시에 답이 없기도 합니다. 이 부분은 제가 2017년 11월 5일에 올렸던 "문제의 해결(링크 클릭)"이라는 포스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한 가지 더... 작년 장미 대선 중, 민주당의 X맨 홍준표는 문재인 후보에게 성소수자에 대한 이념 검열을 시도했던 적이 있습니다. 문재인은 홍준표의 이념 검열에 뜨뜨미지근하게 대응해 진보진영으로부터 어마어마한 비판에 시달렸고... 다음은 관련하여 제가 교육도시 서울 카톡방에 올렸던 글입니다. 


“비난(또는 문제의 지적)은 심플하고 자극적이며, 변명(또는 문제의 해결)은 복잡하고 답답해 보일 수밖에 없죠. 그게 바로 문제의 해결 방법을 제시해야 하지만, 결국 누가 문제를 잘 지적하느냐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는 선거가 가진 딜레마... 진보의 탈을 쓴 무책임한 근대주의자들은 가장 용감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문제의 해결에는 그닥 관심이 없는 가장 비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의 지적만으로 세상이 바뀔 수 있다면 세상이 이 꼬라지가 되었겠습니까?

지난번 대선 TV 토론회에서 때 홍준표 후보가 문재인 후보에게 동성애를 지지하느냐고 물었죠. 문재인 후보는 명확한 답변을 피했습니다. 진보진영에서 난리가 났죠. 가부장제에 유교문화가 결합된, 거기다 꼴통 개독들이 판치는 한국사회에서 적어도 동성애 문제는 아직 당위 보다는 합의가 더 중요한 이슈입니다. 더더군다나 선거판에선... 만약 문재인 후보가 당위적 판단으로 동성애를 지지한다고 했으면 당선이 될 수 있었을까요?

맑스가 자본론 서문에서 말했습니다. 사회적 관계의 피조물인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고... 마치 세월호 사태 후 책임을 전가할 사람을 찾느라 혈안이 되었던 상황이 떠오릅니다. 최초의 책임자는 비정규직 선장이었죠... 

구조화된 교육 문제와 관료문화의 문제를 교육감이 혼자서 해결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제발 누군가에게는 책임을 전가해 자신은 그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근시안적 태도를 버리셨으면 합니다. 

선생님의 글을 보면 간음한 여인에게 죄 없는 사람이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돌을 던지실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육감도, 선생님도, 그리고 저도 부족하디 부족한 사람입니다.”


제가 현답을 할 수 없다는 밑밥을 어느정도 깔았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저는 주수원 선생님의 질문(?)에 세 가지로 답하고자 합니다.


1. 개념의 혼재

시대라는 것이 무우 자르듯, ‘어제까지는 근대였고 오늘부터는 탈근대라고 합시다!’라고 할 수 없듯, 현재 근대의 터널을 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개념의 혼란과 가치 분균형의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부정과 부실’입니다. 얼마전 서울시의 진보교육감 후보 경선(촛불 교육감?)에서 이성대 후보는 경선결과 발표 직후, 부정의 정황이 보이므로 경선 무효를 주장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선관위 조사 결과를 받아들여 아름답게 진행 중...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원래 득표 결과는 발표하지 않기로 했는데, 모 신문사에서 조희연 후보가 압도적 지지로 당선이 되었다고 발표를 해 버렸습니다. 즉, 부정을 이유로 경선을 무효화하기에는 그 차이가 너무 컸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성대 후보가 자신은 20%의 지지밖에 받지 못했지만, 부정한 경선이므로 이 선거는 무효다라고 끝까지 주장했다면... 아주 볼만했을 겁니다. 선거의 목적이 ‘대중들의 선택’에서 ‘부정 유무의 확인’으로 바뀌었을 테니까요. 만약 신이 관장하는 선거라면 모를까... 인간은 부정을 완벽하게 막을 수 없습니다. 그걸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신념은, 대중들이 외면해도 신이 부여한 것이므로 물러설 수 없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죠. 

다음은 민과 관입니다. 거기다 학까지 끌어 넣어 보면... 개념이 아주 엉망진창이 됩니다. 어공인 저는 민인가요, 관인가요? 시민의 대표로 선출된 자치단체장과 의원 나리들은? 관의 위탁을 받아 운영하는 센터의 직원들은? 국가로부터 가르칠 자격을 부여받은 교사는? 이러한 개념의 혼재가 민・관・학 거버넌스의 발목을 잡고 있고, 각 주체들은 매우 자의적이고, 편의적으로 주체를 구분합니다. ㅋ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바로 이성과 본성입니다. 인간은 동물인가요, 인간인가요? 참 바보같은 질문이죠? 인간은 생존 방식으로 ‘관계’를 선택한 순간부터 동물적 본성을 억눌러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성이라는 것이 등장했죠. 이성은 인간을 동물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입니다. 인간같지 않은 인간은 이성으로 본성을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을 말하죠. 인류는 신이 지배했던 중세를 벗어나면서 인간은 신보다 위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성의 오만이 시작되었죠. 그것이 바로 근대입니다. 완벽한 인간에게 구질구질한 관계는 필요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근대... 하지만, 지금은 그 오만에서 벗어나고 있는 중이죠...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통해 이성으로 억눌린 동물적 본성에 주목한 이유는... 인간은 이성을 가진 인간인 동시에 영원히 동물이 가진 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2. 개념에 대한 가치 부여

개념의 혼란은 뭐, 그렇다고 칩시다. 그런데 아직도 이성의 오만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은 이 모든 개념에 가치와 질서를 부여합니다. 뜨뜨미지근한 부실보다는 부정이라는 말에 더 자극적으로 반응하고, 관은 악마고, 민은 절대적으로 옳다는 생각을 하는가 하면, 인간의 동물적 본성은 나쁜 것이니 이성으로 완벽하게 억눌러야 한다는 가능하지 못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죠. 

부실은 완벽하지 못한 인간이 허용한 부정의 가이드라인입니다. 부실이 확대되어 인간이 합의할 수 없는 부정으로 나아가는 걸 막아야 하겠지만, 마치 참과 거짓만을 구분하기 위해 만들어진 디지털 신호처럼 0과 1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 인간 사회죠... 

저도 구청에 어공이 되기 전까지는 제가 관념적으로 인지하고 있던 관을 절대악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민과 관을 나누기 전에... 민도 관도 모두 인간이라는 생각을 해야 하는데... 먼저 선부터 긋고 시작하죠. 어쩌면 이 부분이 저와 김태정의 가장 큰 차이... ㅋㅋ 

어쩌면 인간은 이성을 갖기 시작하면서 인간이 동물로서 가질 수 있는 많은 능력을 포기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자연재해를 미리 감지하고 움직이는 들쥐가 가지고 있는 그 어마어마한 능력을... 극단적으로 이성적인 인간은 이성 밖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신도 동물적 본성을 숨기고 있으면서, 그걸 밖으로 표현하는 인간을 분리하죠. 이것이 참 무서운 건데... 히틀러가 인종학살을 한 이유는 자신의 관점으로 자신과 다른 것을 분리해 제거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은 거죠. 즉 완벽히 이성적인 인간은 감정도 그만큼 억제됩니다.


3. 인정의 결합, 그리고 기다림

마지막입니다. 저는 주수원 선생님의 질문에 이렇게 우문으로 답하고자 합니다. 거버넌스는 인정의 결합이어야 한다. 부실의 쓸모와 부정의 가치를, 민과 관이 각자 다른 역할 속에서 길러온 근육을, 그리고 동물에서 떨어져 나온 인간의 이성의 한계와 본성의 필요성을...

그리고 맨 처음에 링크한 글에 있는 것처럼...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전 사실 거버넌스에 들어오지 못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는 가치를 잣대로 들어오면 되네, 안되네 하지만... 이해관계의 충돌이 없다면, 그런 거버넌스는 아예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전 가끔 이야기 합니다. 이해관계로 인해 현실을 합의할 수 없다면, 미래를 합의하자. 우리가 거버넌스를 하는 이유는 현실의 이해관계를 해결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해와 이해의 연대와 결합으로 미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라고... 거듭 말씀드리지만, 어떤 우월한 이해가 다른 이해를 천박하다고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은 이해관계에 놓여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 또한 심각한 가치와 신념의 이해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주수원 선생님은 현재 협동조합이나 거버넌스 등이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들 속에서 ‘과소대표’와 ‘과대대표’라는 핵심적인 질문을 끄집어 내셨습니다. 저는 아둔하여 그 촌철살인의 질문에 이렇게 장황하게밖에 답할 수 없음을 혜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ㅠㅠ



@back2ana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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