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적 필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확실히 필연보다 우연의 결과이다.
자식이 부모를 선택할 수 없듯... 부모도 자식을 낳을 때 부모가 가지고 있는 각기 다른 유전자의 비율을 의도적으로 섞을 수 없다. 이는 부모가 자식의 성을 정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누군가는 첫째로 태어나고, 또 누군가는 둘째나 막내로 태어난다. 예전과 다르게 아이를 낳을지 말지, 낳으면 몇을 나을지 정도는 의도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아이에게 어떠한 필연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모든 첫째와, 모든 막내와, 모든 외동이 같은 성격으로 수렴되지는 않는다.

유아기 때 접하는 다양한 시각, 청각, 그 외 다양한 감각 정보를 부모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을까? 맹모 삼천지교? 그것 또한 우연한 결과에 대한 설명일 뿐이다. 모든 사람이 맹자의 엄마처럼 행동한다고 해서 맹자를 마치 붕어빵처럼 찍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인 동시에 가능성, 내가 나일 수밖에 없는 우연적 필연이다.

우연은... 마치 자본처럼 불확실하다. 자본과 우연은 서로의 인과관계이며, 또 서로의 공생관계이다. 우연이 가지고 있는 불확실성은 자본의 확산과 침투를 눈감아 주고, 자본의 확산과 침투는 불확실성을 가중시켜 우연의 자양분을 만든다.

현재는 과거라는 우연이 수 없이 축적된 결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필연적으로 의도할 수 없다. 지나친 필연은 오히려 역설적 결과로 이어진다. 이명박근혜 정권의 탄생은 필연의 오만에 빠진 진보가 부른 역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박근혜는 보수가 의도했던 필연과 그 오만이 불러 일으킨 촛불에 의해 파면 당했다.

우연과 도착의 시대...
중세가 암흑의 터널이었다면, 근대는 인간의 오만이 만든 필연과 확신의 터널... 그래서 근대를 벗어나고 있는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필연과 확신이다. 탈근대로 접어들면서 신념으로 가득 찬 확신, 그리고 필연의 오만은 늘 역설적 결과를 초래해 왔다. 우리가 우연의 시대인 현실을 제대로 진단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 진단의 결과를 확신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인류의 종말을 비껴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당장 내가 실천해야 하는 것은 바로... 확신을 거두는 일이다. 난 과거도, 현재도, 그리고 우리의 미래도 확신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대중은 그저 1/n의 집합체...
나의 영향력이, 재력이, 신념이 아무리 우월하다고 하더라도 난 그저 1/n일 뿐... 그래서 탈근대의 진보는 내가 우월한 영향력, 재력, 신념으로 n/n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른 1/n의 상식과 결합하는 것이다. 난 미래를 필연의 힘으로 주도하려고 하는, 그래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역사의 진보를 막고 있는 모든 우월한 1에 대항할 것이다. 우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정치와 행정 권력, 우월한 재력으로 모든 관계를 소비로 대체하려고 하는 자본과 시장의 노예들, 그리고 우월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시민 밖, 아니 시민 위 시민단체들... 그들이 바로 탈근대의 진보를 가장 구조적으로 막고 있는 적폐이자, 보수이다.

@back2ana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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