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세대 논리는 모두 잊어라!" 전상진의 「세대 게임」

전상진의 「세대 게임」
지금까지의 세대 논리는 모두 잊어라!

“한국에서 벌어지는 세대 전쟁의 해법 찾기가 어려운 까닭은 그것이 세대 전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문 131쪽 중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생산력 확대의 성취를 이룬 자본주의와 그것을 방에 날려버릴 있는 핵무기로 인해 우리는 어느 때보다 평화로운 시대를 보내고 있다. 원래 가진 것이 많으면 포기하기도 힘든 ... 인류는 최근 몇백년 사이 핵무기 한 방으로 날려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문명의 성취를 이루어 냈다. 하지만 약육강식의 야만과 물리적 전쟁이 사그러 들었다고 해서 인류가 더 행복해졌다는 것에는 선뜻 동의가 되지 않는다. 


지나친 평화는 자본주의에 해롭다. 일찍이 1930년을 전후해 경험했듯 아무리 신자유주의로 화장을 바꿨다고 해도 여전히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치명적인 모순은 과잉된 생산물의 처리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인가 결핍된 불행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세대 전쟁은 물리적 전쟁이 사라진 평화의 시대에 불행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뿐만 아니라 세대 전쟁은 세대 간에 벌어지는 소득과 소비를 둘러싼 전쟁이라 자본주의적으로도 매우 유익하다.


“세대를 겨냥하는 세대 전쟁론적 개혁의 예리한 창은 문제의 구조적 원인, 예컨데 자본, 기업, 그에 기생하는 정치 권력과 같은 원인들을 겨누지 않는다. 그런 탓에 세대 전쟁론이 내세우는 청년에 대한 배려는 말잔치에 불과하고, 더 나아가 청년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 차별을 강화하는데 기여한다.” (p. 81)

"하지만 늙은이들의 사정이 나아진 까닭은 복지 정책이 개선되었기 때문이지만, 젊은이들의 사정이 악화된 것은 복지국가가 그들의 몫을 빼앗아서가 아니라 노동 시장의 상황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p. 116)

"사실 빈곤 문제는 전통적으로 ‘계급’이나 ‘계층’의 사안으로 다뤄졌다. 하지만 세대 전쟁론자들은 이를 세대의 문제로 새롭게 번역해냄으로써 앞서도 인용했던 레스터서로의 묵시론적 예언을 따른다. '가까운 미래에 계급 전쟁은 빈자와 부자의 대결이 아니라 젊은이와 노인들의 싸움으로 다시금 정의될 것이다.'" (p. 118)

"세대가 가진 매력을 활용하여 꾸며진 세대 전쟁론의 도덕적 명확성은 아주 훌륭한 “대량 주의분산 무기”다.” (p. 122)


세대학자(?) 전상진은 세대 전쟁이 가지고 있는 논리적 허구에 대해 오랜 시간 침묵(?) 왔다. 침묵은세대 게임’이라는 새로운 세대 논리를 벼르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전상진은  「세대 게임」 4장, '세대 전쟁-청년 대 기성세대의 대결'에서 기존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세대 전쟁의 4가지 요소를 매우 설득력 있게전달한다.
첫번째, ‘저출산 고령화 인해 국력이 추락하고, 성장 동력을 상실하고, 노인 세대에 대한 부양비가 늘고, 혁신의 잠재력이 고갈된다는 논리.
두번째,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인의 투표권 행사로 인해 탐욕스러운 노인이 세상을 지배하게 것이라는노인의 지배논리.
세번째, 고령자들이 과거에 사회보장 체제에 투입한 기여보다 현재 받는 급여가 많다는세대 형평성”과세대 회계” 논리.
네번째, 생산에 참여하고 있는 ‘생산 세대’는 미래의 생산 세대인 ‘양육 세대’와 과거의 생산 세대인 ‘부양 세대’를 먹여 살리는 패자이고, 양육 세대와 달리 미래 노동 가치가 없는 부양 세대는 승장 세대라는 복지국가 세대 논리.

지금까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었음직한, 세대가 서로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논리를 매우 설득력 있게 정리했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 그래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지? 우리가 세대 전쟁론을 듣거나 주장하면서 답답한 이유는 답이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는 절벽으로 향하고 있는데, 길이 절벽으로 가는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멈추지 못한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는 하다. 자본주의의 달콤한 소비에 빠진 우리는 절대 멈추거나 되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4장의 마지막 절인세대전쟁론 비판’에서 전상진은 바로 자신이 직접 매우 설득력 있게 전달한 그 세대 전쟁 논리를 처참하게 깨 부순다. 아니, 아예 잘근잘근 씹어서 가루를 내 버린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한국에서 벌어지는 세대 전쟁의 해법 찾기가 어려운 까닭은 그것이 세대 전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p. 131) 원문을 그대로 카피해서 붙인다면 모를까, 그 면도날 같은 논리의 전개를 발췌해서 요약하는 것은 내 빈약한 능력으로는 무리다. 자세한 내용은  「세대 게임」, p. 101 ~ 107을 참조하기 바란다. 개인적으로  「세대 게임」의 엑기스는 그 일곱 페이지에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음모론의 시대”도 읽어보았지만, 전상진의 책은 읽기가 쉽지 않다. 논리적 설명을 위해 논리를 너무 쪼개는 경향이 있다. 전체를 개의 논리로 나누고 각각의 논리를 세분화하여 설명한다. 마치 드론에 올라타 있는 느낌이다. 하늘 위에서 숲을 조망하다가 갑자기 숲 속으로 곤두박칠 쳐 나무 하나, 하나가 가지고 있는 디테일을 살핀다. 그러다가 다시 숲을 조망하기 위해 부상한다. 현기증이 난다. PT 친다면 파워포인트식 나열 구성이 아니라, 전체와 부분을 넘나드는 프레지식 논리 전개랄까?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명쾌한 논리의 전개를 경험한다. 마치 롤러코스트를 탄 후 울렁거리는 속을 사이다로 시원하게 진정시키기라도 하는 것 같은...


세대학자 전상진은 세대 논리는 그 논리를 조작하는 과정에서 책임을 전가하고, 지지자를 확보하는 다분히 정치적인 player가 존재하므로... 그렇기 때문에 세대가 당사자가 되어 치르는 ‘세대 전쟁’이라는 단어는 세대 논리의 일부일 뿐, 전부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대들의 싸움판에서 취할 수 있는 역할은 다음의 세 가지라고 충고한다.

① 만약 이미 재벌에 속해 있거나 정치를 할 생각이라면 세대 게임의 Player가 될 수 있다.
② 세대 게임의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세대 전쟁터에서 소모되는 대체 가능한 병졸이 될 것이다.
③ 그래서 세대 게임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의심하고 주저하는 역할이 필요하다.

세대들의 싸움판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취할지는 책을 읽는 과정에서 숙고하여 판단하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제1장 ‘의심하고 주저하기’의 도입부에 있는 ‘파울 파츨라비크’의 우화를 소개한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열쇠를 찾고 있는 취객과 경관.
경관은 취객에게 묻는다. “정말 여기에 읽어버린 게 맞소?”
취객은 말한다. “여기가 아니라 저긴데, 저긴 가로등이 없어서 못 찾아요.”

‘선의’를 가지고 돕던 경관은 취객의 ‘지휘’ 아래 헛된 일만 한다.
혹시 우리도 ‘세대 프레임’의 강렬한 불빛에 현혹되어 
엉뚱한 곳만 주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back2analog

Comments 1